[스토리人] 한국판 '태양의 서커스'를 꿈꾸며... "예술은 내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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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人] 한국판 '태양의 서커스'를 꿈꾸며... "예술은 내 운명"
  • 박주연 기자
  • 승인 2023.07.28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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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쿱 김광수 대표

<편집자註> 시민사회는 '시대의 창(窓)'일뿐 아니라 가장 강력한 '여론 형성의 장(場)'입니다. 세상의 흐름을 알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읽지 못하고선 미래를 꿈꿀 수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人)과 쉴새없이 소통하는 시민단체 속 각양각색 사연을 [스토리人]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립니다.  

여기, 한국의 '기 랄리베르테'를 꿈꾸는 이가 있다. 누구냐고? 아니, 기 랄리베르테가 누구냐고? 기 랄리베르테는 거리의 공연자이자 세계적인 아트서커스 그룹 '태양의 서커스' 설립자다. 아트쿱 김광수(53) 대표가 궁극적으로 꿈꾸는 롤모델이다. 물론 김 대표 스스로 한 말은 아니지만 그의 이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충분히 어울린다.

80년대 문화운동으로 풍물을 처음 접했다는 김 대표는 이후 그의 인생이 된 국악의 대중화를 위해, 그리고 가난하고 배고픈 거리의 예술가들을 위해 지금껏 '예술가들의 생계 해결'을 고민해왔다. 그러다 세계 경제 위기 속 하나의 경제모델로 떠오른 협동조합에 아이디어를 얻어 한국에서 협동조합 설립 등 문화 확산도 거들었다.

예술인 창작 연습 공유공간 ‘아트쿱’ 대표인 그는 축제·전시·공연기획자로서, 오늘도 예술가들의 삶을 다독이며 고민한다.

서울시 사회적경제 한마당 기획·연출, 서울시 로즈메리힐 축제 기획·연출, 북촌한옥마을 크리스마스 축제, 한국 콘텐츠진흥원 융합콘텐츠 심사위원, 사회적경제진흥원 SE프로 전문위원, 청평수제맥주축제 연출 등 그의 이력서를 빽빽하게 채운 숱한 경력은 그의 관심을 그대로 반영한다. 예술가들의 먹고사니즘을 챙기며 동시에 사회운동과 환경운동도 함께 해왔다는 그를 NGO저널이 만났다.

"예술하느라 파뿌리처럼 머리가 허얗게 세셨냐"고 묻자 활짝 웃는 아트쿱 김광수 대표. 그의 최대 관심은 어떻게 하면 예술가들이 생계를 유지하며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가에 있다고 한다.
"예술하느라 파뿌리처럼 머리가 허얗게 세셨냐"고 묻자 활짝 웃는 아트쿱 김광수 대표. 그의 최대 관심은 어떻게 하면 예술가들이 생계를 유지하며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가에 있다고 한다.

- 예술협동조합 ‘아트쿱’ 대표로 활동 중인 것으로 압니다. 이름에 특별한 뜻이 있습니까?

"아트쿱은 예술가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단체입니다. 80년대 후반에 지역 시민단체에서 작은 모임으로 시작했다가 90년대 초반에 예술전문단체로 전환하고 2011년 행안부에서 ‘마을기업(※ 지역주민이 각종 지역자원을 활용한 수익사업을 통해 공동의 지역문제를 해결하고, 소득 및 일자리를 창출하여 지역공동체 이익을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설립·운영하는 마을단위의 기업)’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마을기업을 거쳐 2012년 협동조합기본법이 만들어지면서 협동조합으로 전환했습니다. 이후 쭉 국악나루협동조합으로 활동해왔죠.

국악을 기본으로 해서 판소리, 연극 등 다양하게 활동해왔습니다. 말하자면 국악의 대중화를 꿈꾸었던 거죠. 하지만 국악에 대한 편견 탓인지 우리 단체가 연극, 창작뮤지컬, 축제기획 등 가리지 않고, 또 팀에 비보이 친구들도 있고 분야와 구성이 다양하다 보니 “국악나루가 그런 것도 해요?” 하는 질문을 많이 받게 되더군요. 고민 끝에 영문 이름인 ‘아트쿱’으로 바꾸었습니다."

- 아트쿱 구성은 어떻게 됩니까?

"운영진 5명에, 같이 활동하는 팀으로는 30여 팀 정도가 있습니다. 회원은 1400명 정도 있고요. 필요에 따라 프로젝트 형태로 공연을 진행하고 있어요."

- 협동조합을 만들 때도 자본이 필요했을 텐데요.

"예술가들이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투자 자본을 넣기 쉽지 않죠. 그래서 처음에 10원 협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 무슨 협동조합이라고요?

"10원 협동조합입니다. 저도 이전에 사회적 기업 심사를 해본 경험이 있어서 여러모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술가가 낼 수 있는 최소한의 비용이라는 상징적 의미에서 발기인 5명에 한 주당 10원으로 각 개인당 100주씩으로 정했습니다. 그렇게 서류를 만들어 해당 등기소에 제출했더니 반려합디다. 장난인 줄 알고 다시 돌려주더군요. 하하.

아트쿱 협동조합 설립 때 해프닝을 들려주던 김 대표는 "예술가들의 삶이 참 고달프다"며 그들을 위한 지원 활동을 지속적으로 해나가겠다고 했다. 아울러 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격려, 후원도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아트쿱 협동조합 설립 때 해프닝을 들려주던 김 대표는 "예술가들의 삶이 참 고달프다"며 그들을 위한 지원 활동을 지속적으로 해나가겠다고 했다. 아울러 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격려, 후원도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협동조합이 만들어지던 초기엔 관련 업무를 하던 공무원들도 이해를 잘 못 했습니다. 설립절차도 잘 모르고요. 제가 오히려 서울시에 알려주곤 했죠. 아무튼, 저는 “하자 없는 완벽한 서류인데 무엇이 문제냐”고 끝까지 관철할 생각이었지만 담당 공무원이 몇 번 반려하다가 ‘인지세도 안 나오니 제발 봐달라’고 하도 사정해서 금액을 수정해 제출했어요. 담당 공무원이 기겁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각나는군요. 하하.

아무튼, 그때 같이 활동했던 5명이 초기 발기인 겸 조합원으로 그리고 나머지 친구들은 회원으로 지금 활동하고 있습니다. 예술가들이 매번 조합 회의에 참여하기란 쉽지 않아서 운영 멤버 외에 나머지 사람들은 회원으로 두고 프로젝트마다 그룹별로 운영하고 있죠. 이 예술가들을 모두 정규직으로 고용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아직은 요원하죠.

언젠가는 저희의 롤모델인 캐나다 퀘벡의 ‘태양의 서커스’와 같은 공연도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 ‘태양의 서커스’는 1984년 퀘벡주의 몬트리올에서 10명의 단원으로 시작해 세계 최대의 서커스 공연 기업으로 성장한 캐나다와 퀘벡의 대표적인 상징. 캐나다의 거리 공연자 기 랄리베르테가 설립한 엔터테인먼트 회사다. '태양의 서커스'는 우리나라로 따지면 유랑극단과 비슷하다.)"

 

운명처럼 만난 사물놀이, 그리고 시작된 사회·문화운동

- 어떻게 이 일을 시작하게 되셨습니까?

"20대에 처음 예술을 시작하고 타악을 시작했을 때 마음 놓고 연습할 공간이 없었어요. 예술가들이 자유롭고 편하게 눈치 안 보고 창작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전국에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고민에서 시작한 겁니다. 그동안 정부 보조금 사업이나 지원 사업도 했지만 예술가들 생계를 위한 창작 콘텐츠 작업에 집중해왔어요.

지역에 널려 있는 유무형의 자원들을 활용해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하기 시작하다 마을기업이 되면서 제가 사는 강동구 암사 선사 유적지를 중심으로 선사와 관련된 콘텐츠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고려대 교수들과 아이들 교육용 책자도 만들고 체험프로그램도 개발하고 공연도 볼 수 있는 종합프로그램을 만들어 순회공연도 하고 지역축제나 선사 축제에도 초청받아 공연도 하면서 상설화 작업을 시도했지만 잘 안 됐습니다."

김 대표가 총감독을 맡아 진행한 제11회 하남고니축제/사진제공=김광수 대표
김 대표가 총감독을 맡아 진행한 제11회 하남고니축제/사진제공=김광수 대표

- 왜 잘 안됐습니까?

"저희의 열정만으로는 잘 안 되더군요. 주변의 도움도 필요하고 사회 환경도 그렇고...여러모로 순조로워야 하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어쨌든 좌절도 했지만 여전히 지역 예술가들에게는 저희가 시도했던 것들이 좋은 모델이라는 생각으로 그런 종류의 프로젝트들을 계속해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 20대에 처음 예술을 시작했다고 하셨는데, 분야가 어떤 겁니까? 혹시 밤무대 뽕짝 예술도 있습니까? 농담입니다.

"하하. 농담인 줄 알았습니다. 사물놀이를 배웠어요. 80년대에 선배들로부터 풍물을 문화운동의 차원에서 처음 접했죠. 그때는 공부보다 사회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다양한 단체 활동도 하면서 우리 사회 이런저런 모습에 분노하기도 하고 연민하기도 하고요. 언젠가 우연히 동네에서 건물 철거 장면을 지켜봤는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국가의 폭력이랄까요? 그런 점들을 느꼈죠.

지금 고속터미널 뒤 삼풍백화점 근방의 마을이었는데 철거를 통해 사라졌어요. 마을이 사라지고 번듯한 건물들이 들어섰지만 어쨌든 그런 경험들을 통해 우리 사회를 다시 보게 되었고 종교적 차원의 고민도 하고 방황도 하다가 선배들도 만나고요."

- 어쨌든 그 문화운동이 생계유지에는 현실적으로 큰 도움이 안 됐겠군요.

"생계는 지금도 어렵습니다. IMF 이후 빛도 많이 지고 있고 실제로 어려워요. 그러나 기회들은 많았습니다. 어쨌든 ‘이 길을 한번 가보자’고 한 것이 저에겐 인생길이 되었던 것 같아요. 아직까진 운이 좋았다고 느낍니다."

김 대표가 기획한
김 대표가 기획, 연출한 환경교육극 순회공연 중 장면/사진제공=김광수 대표

 

국악 대중화를 위한 콘텐츠 기획과 공연 활동 그리고 번민

- 후회는 안 됩니까?

"왜 없었겠습니까. 일하면서 후회도 많이 했죠. 하지만 그때마다 지금 후회하고 길을 바꾸면 더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예술가의 길에 들어서 공연을 하게 되고 타악 연주자로 활동도 하면서 예술 안에서도 차별을 느낀다는 점이에요. 예를 들어 똑같이 공연하는데 서양 클래식이 훨씬 더 존중받고 대접받는 점이랄까요?

축제에 가면 그 축제의 문을 저희가 열지만 관객의 환호는 저희의 몫이 아닌 거죠. 저희는 드러나지 않는 존재가 돼요. 국악나루로 활동하면서 국악이 가진 좋은 점들을 알리려는 노력을 많이 합니다. 대중화를 위해 퓨전 공연팀도 만들면서 이것저것 시도를 많이 해보지만 대중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이랄까..그 문턱을 넘기 쉽지 않더라고요.

또 옛날이나 지금이나 공연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처우는 똑같습니다. 가난한 예술가들은 자기 삶을 치열하게 살면서 나름의 예술을 꽃피워보려 애쓰지만 공연 한 번에 10만 원 20만 원을 받는 현실 속에 만족해야 하는 처지이죠. 얼굴이 알려진 사람들은 한 번에 2천만 원 3천만 원을 받지만 무명의 예술가, 뮤지션들은 턱도 없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문화예술교육지원법’과 같은 법에도 관심 갖고 고민하지만, 우리끼리 “장애인 지원법 다음이 예술인 지원법일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사회가 예술가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우리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말이죠. 결국 자랑할 콘텐츠를 갖지 않으면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 작업들을 계속해서 해온 것 같습니다.

선사 문화 축제와 같이 사람들이 말도 안 된다고 하는 작업에 계속 도전하게끔 만드는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죠. 선사문화축제는 관광도시인 서울과 선사 문화의 요지라는 차원에서 외국인을 담을 수 있는 큰 저수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유물도 복원하면서 야심차게 만들어 성공했지만 안타깝게도 상설화에는 실패했습니다. 씁쓸하죠."

- 특히 기억에 남는 공연이 있을 것 같은데요.

"기억에 남는 공연을 꼽으라면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호랑아 놀자>라는 작품입니다. 국악 버전으로 만들었어요. 사물놀이, 대금, 모듬북을 비롯해 다양한 퍼커션 연주와 창작동요 그리고 민요, 버나, 고무줄 전통놀이 등 다양한 장르의 연주와 노래, 놀이를 아이들 눈높이에 맞도록 비보이와 협업해서 만들었죠.

아이들이 국악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고 싶어서 정성을 더 들인 공연이었어요. 공연에 8명 정도가 합류해 전국순회공연을 했는데, 사람들이 ‘국악이 이렇게 쉽고 재밌구나’를 알려준 계기가 된 것 같아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김 대표는 내일이 없는 삶을 산다고 했다. 내일이 없으니 오늘 최선을 다해 살고, 더 가지려 하지 않는다고. 모두가 탐욕을 부릴 때야말로 버림받고 낙오한 약자들을 돌아보고 관심을 가져야 할 때라고 말했다. 자신의 묘비명은 '내일이 없이 살다간 사람'이 적당할 것 같다고.
김 대표는 내일이 없는 삶을 산다고 했다. 내일이 없으니 오늘 최선을 다해 살고, 더 가지려 하지 않는다고. 모두가 탐욕을 부릴 때야말로 버림받고 낙오한 약자들을 돌아보고 관심을 가져야 할 때라고 말했다. 자신의 묘비명은 '내일이 없이 살다간 사람'이 적당할 것 같다고.

 

불평등과 사회적 약자가 없는 살 맛나는 세상을 위하여

- 진부한 질문입니다만, 앞으로 목표나 꿈이 궁금합니다.

"하하. 네 진부한 질문입니다만 필요한 질문이군요. 불평등과 사회적 약자들이 없는 세상을 꿈꾼달까요?"

- ‘국민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을 외치는 정치인처럼 너무 모범답안 같은데요. 개인적인 목표는 없습니까?

"하하. 진짜 제 꿈이 그거예요. 살면서 다른 꿈을 꾸어본 적이 없어요. 당장 제 눈앞 현실이 그런 모습들이니까 그때마다 가능하면 함께,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이, 아픈 사람들이 힘들 때 와서 좀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거죠. 가평에 공유숲을 만들었는데, 예술가들이나 쉼이 필요한 사람들이 와서 편하게 쉬다가 갈 수 있도록 꾸며 놓았습니다.

유럽에는 빈집 프로젝트들을 많이 하잖아요. 아직 우리나라는 활성화되어 있지 않은데 오랜 지인의 권유와 배려로 청년들 몇몇과 함께 가평에 머물다가 아이디어가 떠올라 빈집을 활용했죠. 청평 등 공유숲이 몇 군데 더 있습니다. 꿈이 뭐냐고 물으셨는데, 이런 특별한 공간을 만들어보자는 목표가 있어요."

- 영국 극작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문득 생각납니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로 알려져 있죠. 김광수 대표가 묘비명을 쓴다면 어떤 문구로 쓸까가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어떤 문구를 남기시겠습니까?

"질문이 갑작스럽군요. 하하. 글쎄요? 저에 대해 어떤 규정하기가...전 내일이 없이 살다간 사람이지 싶어요. 전 매일 딱 그날 하루만 사는 느낌이에요. 지금도 그래요. 내일 어떻게 될지 그 누구도 모르잖아요. 사람들은 자꾸 내일 내일 하면서 뭔가를 축적하고 더 가지려 하는데 우리는 모두 찰나의 삶을 살 뿐이죠.

너무 많은 것들을 가지려 하고 그것 때문에 한쪽에서 너무 많은 고통을 받는 사람들도 생기잖아요. 자연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런 본능이 없어지진 않겠지만 하루하루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살 뿐이에요."

- 더 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독자에게,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요.

"예술가들과 뭔가를 같이 할 때 앞에 서 계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무슨 뜻인가요?

"예술가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창작하며 또 미래를 보는 사람들이기도 해요. 그런데 제도권에선 무엇인가를 할 때 항상 답을 갖고 재단하고 프레임부터 씌워 시작하죠. 예술가들이 더 좋은 작품을 만들고 활동할 수 있는데도 그런 문제들로 프레임 안에 갇혀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다반사예요. 어쨌든 주변에 예술가들이 있다면 한 번씩 둘러봐 주십사 하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가장 가슴 아프게 읽었던 기사 중 하나가 어떤 촬영 감독이 아무도 찾아보지 않던 중 집에서 홀로 죽어 발견됐다는 기사에요. 사실 예술가들이 나서서 직접 도와달라고 말하지 않아요. 예술인 지원법이나 예술복지재단도 생기는 분위기지만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그조차 사각지대에 놓여 있습니다. 그들은 서류를 쓰는 것부터 난관이거든요.

우리나라는 서류로 가난을 증명해야 도움과 지원을 받을 수 있죠. 이런 부분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습니다. (※ 김 대표는 마지막, 예술인들을 위한 자발적인 후원도 잊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포털 검색 등을 통해 아트쿱 사무실로 연락하면 예술에 관해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NGO저널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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